역대 상쇠

상쇠 계보

역대 상쇠 소개

전판이(田板伊)


 1869년 전라북도 진안 출생으로 한때 남원시 송동면에 거주했던 호남 농악의 명인이다. 전판이는 현재 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호남 좌도 농악이라고 할 수 있는 임실필봉농악, 남원농악, 곡성농악 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또한 「호남 농악」 인명록에는 우도 농악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농악의 지역적 특성을 벗어나, 호남 농악의 중흥과 발전에 기여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전판이의 가락과 부포놀음(일명 개꼬리 상모)은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판이의 구체적인 활동 사항은 알 수 없으나, 그가 큰 영향을 미친 호남 좌도 농악의 계보설을 통해 전판이의 면모를 추적해 볼 수 있다. 먼저 전판이는 임실필봉농악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임실필봉농악의 계보는 전판이에서 이화춘, 박학삼, 송주호, 양순용, 양진성으로 이어지는데, 계보 상 최상위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양순용과 그 주변 사람들의 구술에 따른 것으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필봉 풍물굿의 상위 계보에 속하는 인물이다.

 또한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의 류한준 굿을 잇고 있는 남원 농악의 최상위 계보에 속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남원 농악의 계보는 전판이, 류한준, 강태문, 류명철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전판이가 보유했던 상쇠의 부포놀음이 류한준과 강태문을 거쳐 류명철에게 전승되었다.

 전판이는 전라남도 곡성농악의 계보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곡성농악의 뜬쇠인 기창수가 이화춘 밑에서 농구를 하면서 농악을 배운 점과 전판이와 이화춘이 재인 출신으로 함께 굿을 쳤다는 구술에 입각해 볼 때, 전판이, 이화춘, 기창수, 강순동, 박대업으로 이어지는 곡성농악의 계보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라북도 장수 출신의 소고잽이 홍유봉은 17살에 전판이의 공연을 임실 오수, 완주 상관, 남원 등지에서 세 차례 보았다고 한다. 홍유봉의 제보에 따르면 전판이는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굿을 쳤던 뜬쇠로서 호남 좌도 농악을 굿의 모태로 삼았으며, 장기는 부들 상모 놀이였다. 그 수하에서 류한준과 강태문이 함께 굿을 쳤다고 전한다. 원래 정읍, 이리 등지의 호남 우도농악은 상모를 쓰지 않고 부들 상모를 썼다고 하는데, 이러한 좌·우도 굿의 유사성은 양순용의 구술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전판이를 호남 농악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 물로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참고문헌

이보형, 「 전라남도 국악실태조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0)

양진성, 「호남좌도 임실 필봉굿 」 (신아, 2000)

김익두·김정헌, 「남원농악」 (한국농악보존협회 남원시지회, 2006)


집필자 이영배

             

이화춘(李化春)


 필봉 풍물굿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상위의 계보를 이루는 사람이다.

이화춘의 출생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 전북 임실군 청웅면 면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호적등본 기록에는 오래된 문서에 대한 '기록 말소' 표시와 함께 '이화춘' 이란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한 제보자의 증언에 의하면 이화춘은 한쪽 다리를 많이 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산굿의 영산다드래기가락에서 상모짓을 하며 솟짝솟짝 하고 돌아갈 때에는 번개와 회오리 바람하고 똑같았으며, 이 가락을 따라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구고리 마을의 부쇠 양학동씨의 아버지만이 그 가락을 겨우 따라쳤다고 한다.

 한 제보자에 따르면 이화춘이 살던 마을은 임실군 강진면 백련리 서창마을이었고, 현재 91세의 제보자보다 30세 연상이라고하니 살아 있다면 120여세가 되었을것으로 추정된다. 제보자는 그를 소년 시절에 보고 그 뒤로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

 진안·장수·순창 남원 근방에서는 이화춘 선생 하면 그 이를 덮을 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박학삼/박판봉(朴判鳳)

 박학삼은 1894년 11월 10일 출생으로 1920년 9월에 강진면 필봉리로 이거하여 살았다. 강진면 출신의 이화춘이라는 유명한 상쇠에게 배운 후 상쇠로써 이름을 떨치었고 필봉에 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풍물굿을 가르쳤다고 한다. 기존 마을 수준의 필봉 풍물굿을 걸립패 수준으로 끌어 올린 주요한 인물이다.

박학삼의 이전의 전승계보는 전판이 - 이화춘 - 박학삼 으로 본다. 

 필봉마을주민의 풍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그에게 거주지와 따로 삯을 준비하여 '모셔오기' 를 통해 필봉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굿판의 흐름을 잘 읽으며 상황에 따른 판의 운영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박학삼이 연로하여 더 이상 굿판을 할 수 없게 되자 송주호가 상쇠를 이어 받게 된다. 박학삼은 1968년 12월 6일에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에서 사망하였다.

             

송주호(宋主浩)

 강진면 필봉리 태생으로 박학삼에게 쇠를 전수받았다.

필봉 풍물굿의 상쇠 박학삼과 동서지간인 사람으로, 박학삼 상쇠를 이어 현재 전승되고 있는 필봉 풍물굿의 2대 상쇠를 맡아 양순용이 상쇠를 맡기 전까지 하였다.

송주호는 가락에 능하고 오랫동안 부쇠를 쳤으나 가락을 내고 들임을 잘 리드해야하는 상쇠로써의 판을 운영하는 데에는 미숙함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박학삼 밑에서 풍물굿을 배우며 끝쇠를 치던 양순용에게 일찍 상쇠를 내어주고 다시 소박한 농경생활에 전념하였다.

             

양순용(梁順龍)

 양순용은 1941년 임실군 필봉리에서 태어났고 13살 되던 해부터 박학삼 상쇠 밑에서 끝쇠를 치기 시작하여 14살에 필봉농악의 상쇠를 맡았다. 20살이 되던 해에는 순창 동계에 거주하며 인근 지역에서 뛰어난 상쇠라는 인정을 받아 걸궁굿 연합 상쇠를 맡았던 김문식에게 부포놀음을 전수받았다. 사람들은 양순용을 애기 상쇠라 했다. 

 당시 임실군 지역에서는 농악 연행이 성행하여 5일장마다 굿판이 형성되었으며, 당시만 해도 농악을 치는 마을이 많아 마을간 농악 경연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이때에 양순용은 필봉마을 주민들과 굿패를 형성하여 필봉 마을굿뿐만 아니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각종 걸립굿을 쳤다. 

 1959년 8·15 해방 기념 ‘임실농악경연대회’에서 임실군 강진면 이목리의 뜬쇠 김문식패와 문방리 송주호패 등과 경연하여 1등을 하였다. 그 이후로 양순용의 풍물패는 임실군 지역뿐만 아니라 김문식의 활동 영역이었던 순창 읍내와 순창군 구림면, 정읍군 산외 등지로 ‘걸립굿’을 하러 많이 다녔다. 

 이후 양순용이 20대에 한쪽 눈을 실명하고, 굿패에 소속되어 있던 몇몇 사람이 가정 사정을 이유로 고향을 떠나게 되면서 풍물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양순용은 좌절하지 않고 홀로 풍장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19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시·군 농악경연대회가 많이 생겨서 이런 대회에 나가는 30~40명 단위의 시·군 농악패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 무렵에 양순용이 필봉마을의 10대 젊은이들에게 풍장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순수하게 필봉마을 사람들로 이루어진 60여 명 정도의 필봉마을 풍물패가 구성되었다. 이후부터 이들을 주축으로 임실군 대표로 ‘호남농악발표회’ 등 각종 풍물굿판이나 경연 대회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부터는 차츰 대학생들도 하나둘씩 필봉마을로 ‘풍장’을 배우러 들어오기 시작했고, 양순용은 다른 지역의 풍물굿 명인들과도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양순용은 개인 사정과 경제적 이유로 필봉마을에서 농악단 활동 유지가 어려워지자 활동 무대를 남원으로 옮겼다. 계기는 남원 삼동굿을 통해 인연이 맺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양순용은 남원시 보절면 금다리 호동마을에서 필봉농악 전수 및 활동을 다시 이어가게 된다. 이로 인해 필봉마을에서 농악 연행은 잠시 주춤해졌으나 양순용의 계획으로 1987년 2월에 7년 만에 ‘제2회 호남좌도 임실 필봉농악 발표회’를 개최하였고, 이때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 담당 관련자들을 비롯한 여러 전문 관련자들도 이 발표회에 참여하였다. 이 해부터 ‘서울 놀이마당’ 에서 해마다 두 번씩 필봉농악 정기 공연을 연행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8년 4월에는 다시 필봉마을에서 ‘제3회 호남좌도 임실 필봉농악 발표회’를 갖게 되었고, 그 해 8월에 마침내 ‘호남좌도 필봉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1-마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현재 필봉농악은 마을굿의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 결성된 필봉농악보존회를 주축으로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농악 전수 교육, 체험 프로그램 운영과 함께 매 해 마다 ‘정월대보름굿’과 ‘풍물굿 축제’를 개최하여 필봉농악 발표회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다채로운 축제 형식을 빌어 필봉농악 전승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양순용이 이끈 풍물패는 1974년도에 전라북도에서 주최한 ‘제1회 전북농악경연대회’에서 장원을 하였다. 1977년도에는 서울 국립극장에서 주최한 ‘호남농악발표회’에 전사종, 전사섭 등 우도 지역 명인들과 함께 양순용이 쇠잽이로 참가하면서 필봉농악을 전국에 알렸다. 

 1977년 6월에는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차하’를, 1978년에는 다시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장원을 하여 필봉농악이 전국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 8월에는 문화재관리국과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 발굴 보존 정책의 일환으로 이 마을에서 ‘제1회 호남좌도 임실 필봉농악 발표회’를 갖게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 제주도에서 열린 ‘제21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호남좌도 임실 필봉농악단’이 장원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력이 밑거름이 되어 이후 본격적인 필봉농악 전수 활동이 시작되었다. 1983년도에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괴양리 ‘남원 삼동굿’이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양순용을 ‘삼동굿’의 상쇠로 초청하였고,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필봉농악을 전수하는데 일생을 바친 양순용 선생은 1995년 8월 1일 타계했다. 

출 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집필자 이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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